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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레포트 정리

광해군의 재평가 :: 조선 역사 속 실리 외교와 중립 외교의 대가

by 씨리브로스파파 2025.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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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내려진 평가는 수 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평가 속에 묻힌 역사 속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다시 재평가되어야 하는 인물’에서 1위로 광해군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여러 나라와 외교적으로 복잡한 관계이지만, 외교적으로 제대로 해결을 못할뿐더러 힘이 없다. 이러한 처지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볼 때, 그는 명이 망하고 청이 부강하고 있는 시점에서 중립 외교, 실리 외교로써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몇  안 되는 군주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불거지는 것이다.
 
 이번에 광해군의 일생과, 그의 공적, 실정에 대해 조사한 후 그에 대하여 재평가하겠다.
 

광해군의 생애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재위 1608~1623)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없자, 공빈 김 씨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성격이 포악하다고 하여 하지 않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분조를 설치하였고, 그 뒤 7개월 동안 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 하였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 유영경도 적통론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상황의 반전으로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권고로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영창대군, 능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1624년 서인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이 능양군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단행하여 이이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청과 결탁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반도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하여 유배생활 19년 만에 사망하였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하는 생모인 공빈 김 씨의 묘 옆에 있다. 묘의 위치는 이정표도 없고 찾기가 어려운 낮은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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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공적

그의 공적은 크게 왕이 되기 전과 왕이 된 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세자일 적 그의 공적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1. 분조(分朝)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세자였기 때문에, 분조를 그의 공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분조라는 말 자체가 조정을 둘로 나누어서 광해군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위임한 것이기에, 분조도 충분히 광해군의 치적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벌였던 활약은 대단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광해군의 활동은 임진왜란 초 일본에게 힘도 못 쓰던 조선 조정이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또 한 선조의 ‘요동망명설’로 많은 실망과 충격을 받은 백성들에게 적과 싸우겠다는 의지는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백성들에게 ‘분조’는 바로 왕이 아직도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할 명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분조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불과 17세였지만 상처 입은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분조를 이끌어 가는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폐위된 후, ‘분조’의 활약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분조’는 조선이 건국한 이후 최대의 위기 상황에 몰렸던 임진년 한 해 동안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의병을 지원하는 등 매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2. 임진왜란 전후 복구 사업과 파당(破黨)화
 
 현재 정치도 당에 따른 정치가 심하다. 조선시대도 그러하였다. 선조 재위 시기가 당파 정치가 심했던 시기들 중 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당파의 대립을 광해군은 비판하면서 선조 때 이미 뛰어난 행정 수완을 보인 바 있는 나이 많은 신하들을 당색에 관계없이 정승에 임명하여 조정을 이끌도록 하였다. 우리에게 오리정승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원익과 이항복, 이덕형 등이 그들로, 모두 남인 또는 서인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로써 당분간 외교와 국방, 군사 측면에서 당대의 최고 대가인 이들이 국정 전반을 챙기는 가운데 대북과 소북 세력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서인과 남인 소속 젊은 관료들이 그 주변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뒷받침 위에서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전쟁 후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삶에 다소나마 힘을 주었다.
 우선, 대동법이라 하면 특산물을 바치는 제도인데, 농경지의 면적에 따라 쌀을 걷어 그 쌀로 특산물을 구입하도록 한 공물제도의 개혁이었다. 150만 결이 넘었던 농경지가 전쟁 후 54만 결만 남고 나머지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여진족의 후금 세력이 커져 가는 국제정세의 변화 아래서 군량미 비축 필요성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조정은 가급적 쌀을 많이 거두어야 했다. 농민들로서도 방납과 대납의 폐해 때문에 제 값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특산물을 사다 바치는 것에 비해 쌀로 대신 내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다. 이러한 배경아래, 1608 5월 이원인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농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고 처음에는 선혜지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방납과 대납으로 큰 이익을 챙기던 여러 사람들의 저항이 거세었다. 이들은 대동법을 비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동법을 중지시키려고 조직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만약 정치가 단색의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렸다면 대동법의 실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한 허준을 불러 동의보감이라는 의학서를 짓게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약재로만 약을 지어서 약재 값이 상당히 비쌌고 돈 없는 사람들이 약을 먹는 것은 꿈과 같은 현실이었으나, 조선에서 나는 약재로 약을 제조할 수 있게 한 동의보감의 출간으로 만인이 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란 후 전염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이 만연하고 있던 때에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산 약재로 약을 짓는 처방을 내놓은 것은 곧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또한, 임란 후 불타 버린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준공했으며, 전쟁으로 불타버린 서적 간행에도 힘썼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등을 다시 간행했다.
 
3. 실리 외교 정책
 
 광해군의 재위시절은 명, 청 교체기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었던 까닭에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 질서를 세자시절부터 훤히 알고 있었는 듯하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후금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명군의 군사적 능력과 부패 정도를 인지하였다. 광해군이 아는 것과 같이 이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 위한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임란의 파병으로 약해진 반면, 후금은 세력이 점점 강해져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후금 토벌 작전에 나선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이 모셔야 할 부모의 나라이자, 임진왜란 때 10만 대군을 지원한 은혜의 나라였으므로 조선이 지원군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알고 있던 광해군은 명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계속 늦추었다. 파병을 요청한 지 4년 후 명은 후금에게 패하고 다시 조선에게 서둘러 파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후금은 광해군에게 중립을 요구하였지만, 광해군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의 정예군을 출병시킨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을 돕기 위해 군사를 출병시킨 것이 아니라, 후금과 싸우지 말고 싸우는 척하다 투항해 버린다. 이 다음번의 명의 요청에는 1차 출정 때의 패배로 군력이 약해져 후금의 공격에 대비해 오히려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야 한다고 맞대응했습니다. 광해군 이렇게 명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한편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쪽의 편도 아닌 중립 외교,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광해군의 태도가 후에 역사에 폭군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로, 부모를 저버리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조선은 명이라는 부모의 은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의 과실

 광해군은 즉위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서자 출신에 둘째 아들이라는 출신에 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국왕의 위업과 전쟁 이후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 궁궐을 짓기 위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실시하였는데 궁궐 신축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을 과잉 징수하고, 폐모살제를 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과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1. 폐모살제 (廢母殺弟)
 
 광해군이 폭군이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친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 인문대비에게 행했던 폐모살제입니다. 구체적으로 광해군이 주도했는지, 대북파가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였습니다. 이 일이 인조반정의 대외적 명분으로 부각되면서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광해군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서자라는 이유로 명으로부터 왕위계승도 인정받지 못하였고,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동생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다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독살되고, 적장자인 영창대군은 의젓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대북 파는 사형을 청하나, 광해군은 유배를 보낸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구들에 데어 죽고 그 후 인목대비는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2. 무리한 토목 사업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가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과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무리한 처사였다. 이 때문에 전란 후 먹고살기도 힘든 백성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했으며, 건설을 위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서 ‘분조’를 통해 얻었던 인심도 차츰 잃어갔다.
 
3. 은혜를 저버리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그의 실리 외교가 치적으로 오를 수 있지만, 과실로써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이 망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에 대한 나의 생각

 
광해군에 대해 공부하며 다소 씁쓸함을 느꼈다.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정책민심도 중요하지만 리더십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인데광해군에게선 강력한 리더십을 찾을 수는 없었다만약아무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도 광해군이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더라면서인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더라면그가 폐모살제를 하여도 국왕의 자리까지는 쫓겨나지도연산군과 같은 君으로 강등되지 않았을 것이다또한광해군이 계속 집권하였으면 과거의 조선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도 더 강한 나라이면 나라이지결코 약한 나라로 바뀌지도 않았을 것이다필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다른 국가가 섰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어릴 적 들었던 기억이 난다임란이 일어난 후 광해군의 집권한 다음인 인조 대부터 조선이 병자호란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외교적국제적인 힘이 얼마나 약해지고 발전보다는 쇠퇴또한 성리학의 세속화로 여자이기에신분이 천하기에(과거에도 이러하였지만더 심해졌다는 것.) 아까운 인재들이 그 재능을 꽃피지 못한 경우가 많다그런 결과를 초래했기에광해군의 리더십이 많이 아쉬웠다.
 
광해군의 과실은 광해군이 지시하였든 대북파가 지시하였든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 비판받아야 마땅하다하지만 그가 연산군과 같은 폭군혼주로 불릴 만큼 악덕정치를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왜냐하면한반도 최고의 전쟁 이었던 임진왜란을 몸으로 지키며또한 전후 재정비를 위해 힘쓴 것과 뛰어난 외교적 능력으로 당시 혼란하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을 극복했던 그의 업적을 무시한 채 폭군이라고 매도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결국 광해군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폄하된 평가를 받고 있던 것이라 그에 대한 역사학계에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광해군이 분조를 한 것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적들과 싸우고 상처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또 그때 분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물론 현재 우리나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조가 있기에 의병 군도 생겨났고, 백성들도 세자도 저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우리가 우리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조선을 지키겠는가?라는 마음을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만약, 분조가 없었으면 도망가기 바빴던 백성들은 적과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파당(破黨)화를 행하였다. 당을 넘어선 등용, 이를 통해 당의 사리사욕을 위한 정치가 아닌 조금이라도 백성을 향한 정치를 하였다. 이는 동의보감과 대동법을 통해 알 수 있다. 전후 복구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실된 궁궐, 서적의 복구 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란으로 고생한 백성들이 빨리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안 광해군은 유배 갔던 허준을 불러 동의보감을 쓰고, 백성의 경제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선혜지법이라 불렸던 대동법의 시행은 분조를 통해 얻은 민심보다 더 큰 백성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민심을 산 광해군이 무리한 토목공사로 인해 민심을 잃었다. 전란 후 힘든 이들에게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많은 정책은 펼쳤으면서, 어떻게 과도한 노동력 동원과, 막중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곰곰이 광해군의 출신에 대해 생각해 보니, 광해군은 서자에 둘째 아들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광해군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한 듯싶다. 그러나 왕권의 강화를 이루려다 왕권이 더 약해지는 격이 되었기에 겉 외양의 화려함이 국왕의 위엄을 과시하는데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궁궐을 위엄 있고 크게 짓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나, 그것보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자신의 출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신하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더 노력을 했더라면 이렇게 민심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폐모살제. 현대 사회에서도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어머니의 자격을 없애버린다 함은 인격적, 도덕적으로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쉬운데, 유교사상을 중시한 조선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그가 폭군, 혼주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생각은 바뀐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태어난 뒤, 적자가 아니라는 약점 때문에 세자에 쫓겨날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형제를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생을 죽인 일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대 왕들 가운데 태종이 아우인 방석을,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도 폐륜적인 군(君)으로 강등되지 않았다. 이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그들의 반인륜적, 패륜적 행위는 죽은 뒤에도 정치 세력이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러한 정치 세력을 장악하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광해군의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부분은 바로 실리외교이다. 예로부터, 조선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주변 국가인 중국과 일본의 상황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다. 만약, 광해군이 명에게 지원군을 보내줬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켜질 수 있었을까? 조선과 명 연합군이 후금과 전투를 한다. 그러나 전력이 막강한 후금은 연합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하게 된다. 이를 통해, 중국 본토를 장악한 후금은 청으로 이름 바꾸고, 바로 자신을 공격한 나라인 조선을 공격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통해 위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광해군이 명의 은혜를 저버렸다는 서인들의 의견은 이해한다. 하지만, 중립외교를 하지 않고 서인정권의 외교 방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모두들 안다. 인조반정 후, 인조와 서인정권은 중립외교를 철회하고 쓰러져 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결국 고집하다가 청에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국가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이를 통해, 명분 적으로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한 광해군이지만, 실리적으로 좋은 결과를 보여준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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