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레포트 정리

광개토대왕릉비와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by 씨리브로스파파 2025. 2. 7.
반응형

1. 광개토대왕비란?
 
 광개토대왕릉비는 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건립연대는 갑인년, 즉 414년 9월 29일에 왕을 안치하고 그 능 앞에 비석을 세웠다고 하므로 왕이 돌아간 뒤 곧바로 능비 제작에 착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짜여 져 있다. 즉 서두에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신기한 출생담과 건국 담, 그리고 광개토왕의 일반 치사에 대하여 장엄하게 기술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본론으로 들어가 광개토왕 재위 시의 영토 확장 사업의 주요 내용이 연도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끝으로는 광개토왕의 무덤을 수호 관리하는 묘지기 330호의 출신 지역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비문은 능비의 주인공인 광개토왕이 시조인 추모왕으로부터 연면히 이어지는 신성한 왕위의 계승자임을 상기시키면서 주인공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의해서 성취된 고구려 당대의 영광과 평화를 과시하고 있으며, 끝으로는 왕릉의 묘지기에 대한 규정을 선포함으로 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탄탄하게 보장받으려는 강한 의욕을 나타내고 있다.
 

 
2. 생김새부터 다른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우선 생김새부터 남다르다. 비석은 받침돌과 몸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받침돌과 몸돌의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몸돌은 사각기둥으로, 4면의 형태와 크기도 각각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리고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겼다. 이 방식은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도 마찬가지로, 아마도 당시 고구려인들이 비를 만드는 공통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몸돌의 높이는 6.39미터로 그 높이에 압도된다. 너비는 1.3~2.0미터로 윗면과 아랫면이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이 약간 좁은 형태이다. 일부러 그런 모양으로 만들지 않았겠지만, 채석하고 난 몸돌을 적당히 여기저기 다듬었을 뿐, 굳이 네모반듯하게 만들지 않아서 자연과 어울린다.
 전체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글자를 새긴 비면조차 판판하고 매끈하게 다듬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비면은 글씨 새기기조차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상당히 굴곡져 있다. 일반인이 생각하기에 비면이란 으레 반반해야 하고, 비 모양도 반듯해야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이런 데 전혀 개의치 않는 심성을 드러내 보인다.
 
3. 잊혀지고 왜곡된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멸망과 더불어 서서히 잊혔다.고구려인이 아니라면 비가 거대하다는 감탄 말고는 아무런 감정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1,200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1880년 무렵 광개토왕릉비는 다시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선 옛 기록을 보면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우리나라 문헌 중에 광개토대왕릉비를 처음 언급한 문헌은 용비어천가이다.
“평안도 강계 부 서쪽에 강을 건너 140리에 너른 평야가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간에는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성의 북쪽 7 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
 이렇게 조선 초기에는 집안의 고구려 유적을 금나라의 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이를 금나라의 비로 여긴 것이다. 용비어천가 기사에 나오는 금 황제 성은 곧 고구려 국내성을 가리키며, 석릉 2기는 아마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태왕 릉과 장군총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옛날부터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비의 존재 사실을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는 17세기 들어 집안 일대에는 갑자기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 200년 이상 비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진다.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차지하게 된 후, 이곳을 시조의 탄생지라 하여 봉금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경지를 찾아 압록강 일대로 이주해 오는 가난한 농민들이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그 후 1880년 무렵 개간을 하던 한 농부가 비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4.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 왕실과 백제는 공동 부계 선조를 갖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모두 주몽에서 기원되었다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모계선조는 북부여이고 백제의 모계선조는 졸본부여이다. 양자의 통치 집단 구성도 서로 같지 않다. 더욱이 두 나라의 백성은 더욱 다르다. 고구려인은 주로 맥이제부로 구성되었고 백제인은 한계제부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양국은 언어, 문화 여러 방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두 나라 간에 낙랑군과 대방군을 사이 두고 있기 때문에 장시기 동안 두 나라는 왕래가 없었다. 양국 관계의 시작은 기원 3세기이지만 단 한 번밖에 왕래하지 않았으며 진정 빈번한 접촉은 기원 4세기부터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와의 관계에 관한 기록은 영락 6년부터 시작된다.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러 성들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백잔이 의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가 궁핍해져, 남녀 1천 명과 세포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이는 광개토왕이 직접 출병하여 백제를 쳐서 백제의 대동강 이북 땅을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영락 14년(404)
“갑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을 공격하, 평양을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짧게 말해서 백제가 왜를 앞세워 고구려 영토를 침입하니 대왕이 친위병을 친히 이끌고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는 말인데, 이때 당시 백제와 왜의 연합 공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락 17년(407)
“정미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여러 성들을 파하였다.”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사실상 고구려가 반도 북부를 침략한 후 계속하여 남쪽으로 백제를 침략한 역사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땅을 침범하였다 하여 고구려가 역사상 백제에 예속된 국가라 보아서는 안 된다.
 
5.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한 개 민족이며 그의 활동영역은 기본상 중국경내에 있었다. 고구려국은 최초에 중국변강지역의 한 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의 동쪽과 북쪽은 중국의 기타 민족 말갈제부와 부여가 건립한 정권이었는데 그 당시 모두 중국의 지방 민족정권에 속하였다.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은 중국의 요동군과 낙랑군, 대방군이었다. 때문에 고구려 국가가 건립된 최초의 수백 년간 고구려는 신라, 백제와 줄곧 왕래가 없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하고 조선반도에 진입한 후에야 비로소 왕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왕래는 기원 5세기 고구려인이 평양에 천도한 후 많은 고구려인들이 대동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부터이다.
 이젠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발견된 영락 8년대부터의 자료들을 통해 고구려와 신라가 어떠한 관계였는지 알아보겠다.
 영락 8년(398)
“무술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 토곡을 관찰, 순시하였으며 이곳의 남녀 삼백여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백신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았다.”
 이 기사는 신라에 대한 복속 기사로 볼 수 있으므로, 이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의 조공 지역에 편입되었다고 본다.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를 부수고 노객으로 하여금 왜의 민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태왕이 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 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이 기사는 왜가 신라를 침입해 점령하려 하자 신라의 내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왜인들을 물리쳐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기사다. 이 기사의 내용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아신왕 재위 8년(398)의 “재위 8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크게 병마를 징발했다. 호구가 쇠잔하여 줄어들었다.”는 기사에서 뒷받침될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는 기사다. 고구려와 단독으로 싸워 승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긴 백제 아신왕이 왜와 연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광개토대왕비의 영락 9년 기사는 바로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불 수 있다.
 영락 10년(400)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벌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조공하였다.”
 이때에도 역시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였다. 이 기사는 내물왕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국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고구려 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보낸 국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는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때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신라, 백제-임나가라-왜의 대립구도였는데,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신라의 조공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6. 광개토대왕비에서 알 수 있는 일본과의 관계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구려와 삼국과의 관계는 한마디로 한반도의 북부와 중국의 동북쪽을 차지한 강력한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는 조그만 나라 신라가 있으며 고구려에게 계속 영토 침입을 당하여 왜와 화통해서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백제와 수시로 신라 땅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고 가끔씩 고구려를 공격하는 왜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고구려와 왜의 관계 기사는 양국에 있어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고구려의 왜에 대한 토벌 작전은 성격이 명확하다. 고구려에 있어 왜는 복속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면 당시 왜는 확실한 거점이 없었던 것일 수 도 있고 또한 중국의 사서에서 발견되는 실제로 우리나라 최 남쪽에 거주했을 수 도 있다는 설이 맞을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정복의 주요 대상은 백제, 신라였으며, 왜와 비려 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광개토대왕 비문에 따라 400년 남하한 고구려 군에게 타격을 받은 후 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선제공격 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에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0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왕 4년 조는 "왜병이 와서 명활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파하고 300여성을 살획 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구려 대방 지역을 공격한 왜가 1년 후에 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던 왜는 5세기 경 일본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7. 광개토대왕릉비의 가치
 
 광개토대왕릉비는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선 기록이고, 또 고구려인들이 직접 쓴 금석문이다. 문헌이란 것은 전해오는 동안에 시대의 상황에 따라 손본 것이 많고, 베끼는 과정에서 오자, 탈자가 많을 수 있지만, 금석문이란 당시 기록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 사실을 알면 광개토대왕릉비가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기록 가운데서 가장 오래되었고,또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 고대사의 미흡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는 역사학적 가치가 높은 자료임을 알아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그 기록 내용이 기년식으로 되어 있어 동아시아 국가 전체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연구함으로써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한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특히 지금까지 중국 중심으로 제작된 사서의 역사 서술방식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확실한 잣대가 생겨 사대주의 사가들이 스스로 비하시킨 우리 역사를 주체적 입장에서 되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것이다.
 한편 광개토대왕릉비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법 자료의 하나일 뿐 아니라 동양의 금석학상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비신의 웅장함, 서체의 질박함, 비문의 호방함, 자품의 근엄함 등 독창적인 면이 있고, 중국의 옥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식 글자도 적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가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