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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레포트 정리

14세기 중세 유럽 농민반란 :: 자크리, 와트 타일러, 치옴피의 난의 원인과 결과

by 씨리브로스파파 2025.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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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리(농민)의 난 (1358) : 전쟁 중에 흑사병이 생겼으나, 영주는 똑같은 세금을 요구해서 과중한 세금 때문에 반란, In, 프랑스  자크리의 난은 백년전쟁(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 중 북프랑스에 있었던 농민폭동입니다.  자크리(Jacquerie)는 당시 농민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던 자크를 집합명사화한 호칭입니다. 이것은 당시 귀족들이 농부들을 업신여겨 자크(Jacques), 또는 자크 보놈(촌뜨기)이라고 부른 데서 나온 이름입니다.
 14세기는 흑사병·기근·전란으로 농민경제가 혼란하고 게다가 봉건에 대한 반대 바람이 강화된 시기였습니다. 1358년 5월 28일, 보베지방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은 푸아티에의 패전 후(1356), 유랑민 또는 도둑이 된 용병대, 그랜드 컴퍼니의 횡행과 약탈에 대한 자위와 반발이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폭동은 순식간에 노르망디·일 드 프랑스·피카르디·샹파뉴 등 북프랑스의 대부분에 파급되고 군인 출신인 '기욤 칼'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이 지지한 외에는 여러 도시와의 제휴에 실패하고 또 내부의 통제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6월 10일부터 샤를 드 나바르 군대에게 분단되어 그 달 24일까지 약 2만의 희생자를 내고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1358년의 제1차 자크리의 난은 일시 무조직적인 농민 측의 참패로 끝났지만, 1592년에 다시 봉기한 제2차 자크리의 난은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규모적인 것으로 특히 도시시민과의 연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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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타일러의 난 (1381) : 영국인, 전쟁에서 승리하여서 세금감면이나 부역 같은 포상을 기대했으나, 좌절해 버려서 반란
 그 지도자 와트 타일러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부른다. 반란의 직접 원인은 대 프랑스전쟁(백년전쟁)의 전비(戰費) 조달을 위하여 정부가 15세 이상의 전주민에게 부과한 인두세(人頭稅)에 대한 불만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영주제 지배(領主制支配) 그 자체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진정한 원인이었다. 반란은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격렬했으며, 5월 30일에서 6월 28일까지 잉글랜드의 약 절반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에식스와 켄트의 농민군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수도 런던을 점령하고 국왕 리처드 2세로 하여금 반란군의 요구에 굴복하게 하는 힘을 보였다. 반란은 6월 15일, 와트 타일러가 책략에 걸려 살해됨으로써 각지에서 진압되어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 두 반란은 봉건적 둘레에서 벗어나고자 발생
 
 와트 타일러의 난은 로빈 훗이 활약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과중한 인두세와 강제 부역으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농민들은 와트 타일러 밑으로 모여들었다. 농민들은 농노해방, 인두세와 강제부역의 폐지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에 가담한 것은 농민들만이 아니었다. 부패한 사회를 비판해 오던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성직자들도 그 대열에 뛰어들었다. 존 볼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담이 밭을 갈고, 하와가 베를 짤 때, 누가 귀족이고 누가 농민이었는가? 그 누구도 타인의 노동으로 생활해서는 안 된다.”
존 볼의 이러한 설교는 농민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심어주었다. 농민군의 수는 10만을 넘어섰고, 잉글랜드의 3분의 2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런던을 점령한 반란군은 리처드 2세에게 영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토지를 해방시켜 달라는 요구를 받아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한 농민군은 승리의 개가를 올리며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귀족들은 왕을 부추겨 와트 타일러를 죽여버리고 나머지 지도자들도 붙잡아 처형시키고 말았다. 존 볼 역시 처형되었다. 반항하는 농민군을 귀족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와트 타일러의 농민반란은 끝이 났다.
 14세기말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중세 봉건사회의 경제적 기반인 장원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희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아픔의 시기를 겪으며 영주 세력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농민들 중에는 자영농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치옴피의 난 (1378) : In, 피렌체, 양털 벗기는 사람(모직물 생산업자) 임금 작아서 반란
 하층 노동자인 소모공(梳毛工:치옴피)들은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하고 단결하는 것도 금지되어서 빈곤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14세기 후반의 불황 속에서 그 불만이 폭발하여 미켈레가 지도자가 되어 정청을 점거하고 종래의 체제를 뒤집어엎었다. 미켈레는 수공업자와 치옴피를 포함한 정부를 만들어 자기가 통령이 되어 정치를 하려고 하였으나, 1382년 상층 시민 측의 반격을 받아 추방되어 정권은 무너졌다. 그다음에 명문 알비치가에서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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