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미국은 자본주의의 대표적 국가이며 산업화의 긍정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에 오기까지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다. 아메리카대륙은 넓은 토지와 풍부한 자원을 가진 축복의 땅이었고 비록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통해 세계의 리더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중 남북전쟁은 미국역사 속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내전이었고 이 내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북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 또한 발발당시 전쟁의 경과와 전후재건과정을 정리해 보고 남북전쟁이 현재 미국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또 나아가 세계에 어떠한 연향을 주었는지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에 발발하여 1865년에 종결된 미국 남북 양 지역 사이에 노예제도의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내전으로 북부는 37만 명, 남부는 26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는 당시 미국의 인구수의 2%에 해당한다. 우리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막연히 노예제도해방을 위한 북부의 이념에 의한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링컨을 비롯한 북군의 중심이 흑인노예가 아니라 백인남성들이었는데 그런 그들이 순전히 노예들의 삶을 개선시키고 인권보장을 위하여 남부지역과의 전쟁을 일으킨 위대한 해방가라고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따라서 이하 본문에서 남북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전쟁발발 당시 국제정세를 잠시 본다면 이미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통해 이전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 시대로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는 프랑스가 노예제도를 완전히 폐지한 시기는 1848년에 이르러서였고 이후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에서 노예제는 폐지의 길을 달렸다. 노예무역 대국 중 하나였던 남미 각 나라도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를 완전 폐지하였다. 전제국가 러시아도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였으며 우리나라는 1894년 갑오경장을 통해 노비제를 폐지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을 미국 또한 어느 시기에 이룰 것인가가 문제가 될 뿐 거스를 수 없는 것은 자명하였다.
미국내부의 흐름을 살펴보자면 우선 남부는 따뜻한 기후를 이용하여 목화, 연초,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 경영 일명 플랜테이션을 해왔으며 반면 철, 석탄 등의 지하자원들이 풍부했던 북부는 이를 바탕으로 방직, 제지, 금속 등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이제 본문 내용에서는 첫 번째로 이러한 남과 북의 산업구조 차이가 남북전쟁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고, 노예제도에 대한 심각성과 관련하여 노예주를 찬성할 수밖에 없었던 남부와 반대하는 북부의 이념대립이 원인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1828년의 관세법이 남부의 강력한 반발을 유도하고 남캐롤라이나의 연방탈퇴문제까지 야기한 것과 미국-멕시코전쟁에서 획득한 토지에 대하여 노예 주로 하느냐에 따른 <1850년 타협>, 1857년 최고재판소가 드레드스콧사건을 통해 미주리협정은 헌법위반이며 노예는 사유재산으로 기본적 인권을 갖지 않는다는 판결로 나타난 북부의 반발감과 이를 통한 공화당의 세력확장과 링컨의 대통령 당선, 이어진 남부의 연방탈퇴 등의 보다 표면적인 원인과 남북전쟁의 개전과 섬터요새공격 등의 전개과정, 남북전쟁 이후의 재건의 노력과 과연 전쟁이 미국의 인종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고 흑인노예들의 삶에 과연 구원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남과 북의 (산업구조) 차이
미국의 남부는 기후가 따뜻해서 연중 서리가 내리지 않는 날이 200~290일이나 되고 강우량 또한 풍부하여 17~18세기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작물을 재배하여 수출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남부 지방에서는 인구의 5%에 불과한 지주들이 4백만이 넘는 노예를 통하여 목화, 연초, 사탕수수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 경영일명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특히 해안지대의 주들에서 재배되던 면화는 미시시피 유역의 주들을 거쳐 텍사스 주까지 유입될 정도로 면화 생산에 크게 의존했다. 하지만 이러한 남부지방의 면화들은 영국의 섬유시장을 겨냥한 것이었으므로 영국 경제에 크게 의존하게 됐다. 따라서 공업화된 북부지방의 정치적·경제적 힘이 커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면 철, 석탄 등의 지하자원들이 풍부했던 북부는 이를 바탕으로 방직, 제지, 금속 등의 산업을 발전시켜 갔다.즉, 북부 지방은 자유노동,활발한 상업, 다양한 농업 등을 특징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남북의 불화의 근원은 남부와 북부의 이러한 경제적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는 원료생산의 입장에서 자유주의 무역에 찬성했으나, 산업적인 북부는 날로 성장해 가는 상공업 보호를 위해 보호관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확연한 입장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연방에 대한 관점에도 다른 점을 낳았다. 남부에서는 일찍부터 지방이 각기 독자적인 제도를 갖고 있음을 깊이 깨달았고 자신들의 활발한 자유주의 무역을 위해서는 중앙의 지방정부의 힘을 최소한의 것으로 줄이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보호관세를 원하는 북부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내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필요하였다. 이렇듯 남과 북의 차이는 노예문제와 얽히게 되면서 남북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2.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과 북의 대립
남부가 좋은 자연조건들을 바탕으로 이주민들이 대농장 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예들의 지속적인 노동력의 공급이었다. 특히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목화 재배지역이 대륙으로 확대되어 가고 유럽의 특히 영국의 산업혁명에 따른 목화 수요가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자 면화 수출에 의존하던 남부지방은 풍부한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들이 국제노예시장에서 매매되어 남부의 노동력으로 공급되게 되었고, 노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라는 특이한 조건 때문에 대농장노예제도가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북부에서는 자연법과 이성의 기초 위에 만인평등을 주장한 제퍼슨은 1775년 노예 반대 선언을 하였으며 1833년대에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반노예제협회가 결성되어 남부 노예제의 전면적 폐지를 요구하는 급진론이 대두되었다.
남부는 풍부한 노동력 공급 유지 측면에서의 노예제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기 때문에 남부 특유의 관례인 노예제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했다. 북부의 압박을 이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토머스 듀는 선집을 발간하며 노예제 지지론을 옹호했고 존 칼훈은 남부의 노예는 북부의 산업 노동자보다 나은 조건에서 살고 있으며, 노예제는 남부에서 두 인종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노예제도 기반을 둔 남부 경제가 국가 번영의 열쇠라고 주장했다. 남부 백인들은 북부를 탐욕과 방탕, 파멸의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았다. 공장제와 무질서한 이민자들로 가득한 혼잡스럽고 불결한 도시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즉, 그들의 사회는 북부가 겪고 있는 자본과 노동의 불화와는 거리가 먼 안정되고 질서 있는 사회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 생각에 남부는 노동자의 복지를 지켜주며, 귀족들의 세련되고 성숙한 문화생활이 보장된 세계였다. 한 마디로 남부는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만족스러운 생활과 안정을 보장받는 이상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과 더불어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주장에는 흑인의 생물학적 열등함을 설파하는 이론도 한몫했다. 즉 남부 백인들은 흑인에 대해 시민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선천적으로 자기 자신도 돌볼 줄 모르는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또 성서에 근거해서 노예제의 타당성을 주장하거나 경제적 이유를 들어서 정당화 했고 생물학적 이유로 흑인의 인종적 열등함과 체계가 잘 잡힌 사회의 필요성을 이유로 노예제를 인정받으려 했다. 또 북부의 노동자 계급의 빈곤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북부 노동자의 처참성은 남부에서 볼 때 남부의 노예제도 보다 더 처참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북부의 상업체제를 ‘사회의 기생’ 혹은 ‘도덕적 악’이라고 보고 농업체제 사회의 신성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노예제도에 대한 남과 북의 갈등의 원인은 양측 모두 이념과 사상이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북부는 합당한 사회 구조에 대해 ‘자유 토지(free soil)’와 ‘자유 노동(free labor)’이라는 신념으로 의견을 모았었다. 대부분의 북부 백인들은 노예제도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것은 그 제도가 흑인들에게 끼친 해악 때문이 아니라 백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모든 시민이 재산을 소유하고 스스로 자기 노동을 통제하며 자기 향상의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남부는 노예 제도로 인해 귀족주의가 확고해지며, 폐쇄적이고 정체된 사회였던 것이다. 북부가 성장하고 번영하는 반면 남부는 개인주의와 진보라는 가치를 거부한 채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북부의 자유주의 노동자들은 더 나아가 남부가 노예 제도를 미국 전역에 확산 시켜 북부 자본주의의 개방성을 파괴하고 남부의 폐쇄적인 귀족주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노예 제도의 확산에 대항해 싸우는 것은 물론, 미국의 민주주의 이념인 자유노동의 이념을 모든 지역에 확산시키는 것만이 이 노예제 지지 세력의 음모를 타파할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노예제도에 대한 입장 차이는 결국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즉, 남부 백인들은 북부에 노예 제도가 없는 주를 새로 더하면 그 즉시 다수파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는 어느 한쪽이 자시의 입장을 굽히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단순한 노예제도에 대한 입장 철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패배를 의미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남과 북의 대립은 서로 다른 정치 관점차이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북부의 관점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내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필요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부는 지방이 각기 독자적인 제도를 갖고 있음을 깊이 깨달았으므로 중앙의 지방정부의 힘을 최소한의 것으로 줄이기를 희망하였다.
이러한 북부와 남부의 정치적 힘겨루기는 미국의 영토 확장과 서진이 시작되면서 점차 큰 문제를 부르기 시작했다. 미국의 영토 확장은 일명 명백한 운명론-19c 미국 자부심의 성장과 개혁 열기의 자극에서 시작된 것으로 미국이 신과 역사에 의해 방대한 땅 너머로 나라의 경계를 확장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생각-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서진은 이미 헨리 크레이를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은 영토 확장으로 인해 노예제도를 둘러싼 골치 아픈 논란이 예고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으나 무시되었었다.
첫 문제의 시발점은 텍사스를 둘러싼 남북의 견해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원래는 멕시코 소속이었던 텍사스는 남부의 백인들이 노예들과 함께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하려고 이민을 해 텍사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러자 미국 남부에서는 텍사스를 미 연방으로 영입하라는 주장이 나왔고 이를 받아들여 텍사스는 미 연방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후 멕시코는 미국과의 관계를 끊으며 전쟁 준비를 하였고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멕시코 전쟁이 승리로 끝난 뒤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새로 영입 된 텍사스 지역에 노예제도의 인정여부를 놓고 남과 북은 대립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을 위해 자금 승인을 요구할 때 북부의 의원들은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영토에 노예제를 금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고 하지만 이는 상원에서 부결되고 남부에서는 노예이주 권리를 모든 미국인이 새 영토에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해 남과 북의 첨예한 갈등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 노예제도의 허용여부를 놓고 논쟁하는 패턴은 미국이 새로운 영토를 합병하고 확장시켜 가면서 계속 불거져 나오고 있었다. 이를 둘러싼 남과 북의 대립은 결국 남과 북쪽 모두 노예제도의 존재 여부에 따른 자신들의 이익과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한 치의 양보 없이 논쟁을 펼쳤다. 남부에서는 남부 백인들을 경악케 했던 1831년 내트 터너의 노예 반란과 노예제도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된 하남부의 면화 경제의 성장 그리고 남부 사회를 통렬히 공격했던 개리슨과 노예제 폐지 운동의 성장, 해리엇 비처 스토 여사가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남부 노예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의 인기 등을 보면 남북의 첨예한 대립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3. 링컨의 당선과 남부의 연방탈퇴
이렇게 끊이지 않는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 가운데 1960년에 등장한 링컨. 노예해방 선언으로 잘 알려진 링컨은 본래 노예제도에 별 관심 없는 입장이었다. 이는 링컨의 취임연설에서의 노예문제에 대한 언급이 당시의 링컨의 심정을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나는 현재 남부의 노예제도에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간섭할 생각은 없다. 나에게는 그렇게 할 법률상의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며 또 그렇게 하려고 생각지도 않는다......."
하지만 북부를 대표하던 링컨은 노예 제도는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와 평등에 어긋나며, 다른 국가들이 이미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만 그것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제도라고 믿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북부 백인들 대다수가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조건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고 이는 링컨도 마찬가지였다.
링컨은 단지 노예제 문제로 미국이 둘로 나뉘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선거연설에서도 "나는 집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이 연방이 갈라져서 싸우는 것을 멈추는 일뿐이다......"라고 연설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링컨은 미국의 먼 미래를 생각했을 때 북부의 공업중심으로 미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링컨의 생각은 남부에 위협이 됐고 이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노예제 폐지의 위기감과 함께 남부의 연방탈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러한 위기감은 급기야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선두로 하여 7개 주(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텍사스)가 연방에서 탈퇴하는 사태로 발전하게 됐다. 남부인들은 연방 탈퇴의 이유로 링컨을 지지한 표의 99%가 북부에서 나온 것을 들었다. 마침내 1861년 2월 4일,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메리카 연방, 즉 '남부 연합국'의 건국이 선포된다. 1861년 3월 4일에 취임식에서 링컨은 미국의 헌법은 각 주의 자치는 인정하지만, 연방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연방 정부는 남부 7개 주의 행동을 막을 권리가 있다는 것도 천명했다.
그러나 동시에 링컨은 노예 제도의 존속 여부는 각 주의 문제이므로 연방 정부는 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으로서 링컨이 걱정한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남부와 북부가 노예제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하여 '두 개의 미국'으로 분리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예제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연방의 통일이라는 문제보다 다음 단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링컨의 이러한 모호한 태도가 오래갈 수 없었고 결국 링컨과 남부연합의 대립은 남북전쟁의 발발을 불러온 것이다.
1. 전쟁의 시작
1) 개전과 섬터요새 공격
1861년 4월 6일 링컨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수도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요새에 식량을 보내려 하였다. 남부연합은 이것을 연방측의 지원행동으로 보고, 지금이야말로 남부에서 연방군을 몰아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다. 4월 12일 새벽을 기하여 남부연합의 군대는 섬터요새를 포격하였다. 그러자 링컨은 남부의 해상봉쇄를 명령하고 7만 5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이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2) 남북 대치상황
겉보기에는 북부가 월등히 우세했다. 11개주의 900만 인구가 남부 연합에 소속되어 있는 반면, 북부는 23개 주의 2200만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더구나 무기, 철강 생산 공장을 기반으로 군장비가 우세했다. 하지만 미숙한 전투경험과 전략의 실패로 군대의 전쟁 경험이 많고 뛰어난 장성들을 많이 보유한 남군을 이기기 힘들었다. ‘노스버지니아 군단’으로 명명된 남군은 사령관 R.E. 리 장군을 앞세워 북부 침공을 강행한다.
2. 전세의 역전
1)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북군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남군을 지원하는 사태였다. 유럽이 미국 남부의 목화 공급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링컨은 1863년 1월 1일 부로 남부 연합 주의 모든 노예에게 자유를 준다는 ‘노예 해방 선언’에 서명한다. 이로서 남부 주는 350만 명에 이르는 노동력을 순식간에 잃었으며 유럽이 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사라졌다.
2) 게티즈버그 전투
남군은 서서히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1863년 7월 1일~3일 펜실베이니아주 남부의 게티즈버그에 진격한 남군은 북군을 이곳에서 몰아내어 아래쪽의 고지로 밀어붙였다. 양군이 대치하는 전선은 5km까지 벌어져 맹렬한 전투가 몇 차례에 걸쳐 되풀이되었으나, 월일 마침내 리 장군은 버지니아를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에서 남군은 2만 5000명, 북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낼 만큼 인명 손실은 막심했다. 북부에 비하여 남부의 인적, 물적 자원은 훨씬 뒤져 있었기 때문에 남군이 이 막대한 피해에서 세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남군의 우세는 역전되어 남북전쟁은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
3) 해상작전
북부는 공업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해군력의 강화와 재편성을 신속히 수행하여 1863년에 이르러서는 남군의 해상봉쇄를 완벽히 할 수 있었다. 북군은 남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인 뉴올리언스를 해상으로부터 공략하여 서부전선을 지원하였고, 1864년 8월의 모빌항 대해전은 북군의 해상봉쇄를 완벽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남부는 목화의 대유럽 수출과 탄약, 의류, 의약품 등의 수입을 방해받았고, 군사적으로 궁지에 빠졌다.
3. 최후의 결전과 애퍼매턱스
1864년 5월 새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지휘 아래 북군은 대공세를 시작하였다. 윌더니스전투에서 시작하여 약 1개월간 전투를 계속한 끝에 피터즈버그에 포진한 남군을 포위하였고 1865년 4월 마침내 남군전선을 돌파하였다. 전사자와 도망병 때문에 2만 5000명으로 약화된 노스버지니아 군단이 서쪽으로의 퇴로마저 차단되자 리 장군은 북군에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 1965년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양군의 최고사령관인 그랜트와 리의 회견이 이루어져 4월 12일 남군의 항복이 정식으로 인정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4. 전후 재건의 노력과 인종문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은 미국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865년 4월 14일 암살상당하였다.그 뒤 연방정부는 질서 유지와 흑인들의 보호를 위해 12년간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여러 가지 재건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여러 법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흑인의 해방도 완벽히 이루어질 수 없었다. 남부에서도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남북전쟁은 4년에 걸쳐 한 나라가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 싸운 치열한 내전이었다. 전쟁의 이면과 그것이 남긴 상처의 진실을 가리는 문제는 지금 까지도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이 글에서 문제로 삼은 점은 그러한 남북전쟁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혹은 왜 남부와 북부는 서로 대립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일 수도 있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노예문제로 완결 짓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다각적으로 얽혀있는 것이다. 먼저 전쟁의 원인에 대한 접근을 위해서는 당시 19세기 전반기 미국의 남부와 북부를 두개의 분리된 나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19세기 당시 미국 남부와 북부의 산업 구조의 차이를 들 수 있었다. 북부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하여 방직, 제지, 금속 등의 산업을 발전시켜 공업화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남부는 작물을 재배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하여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한 목화, 사탕수수, 연초 등을 재배하는 대농장경영이 주를 이루었다. 영국의 섬유시장을 겨냥한 면화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던 남부는 원료생산의 입장에서 자유주의 무역에 찬성하였으나, 산업화된 북부는 상공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관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납부와 북부는 첨예한 경제적 대립구도에 놓인 것이다.
남부와 북부의 이러한 산업구조의 차이는 노예제도 찬반에 대한 대립에 있어서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면화 수출에 주력하던 납부지방은 영국의 산업혁명에 따른 목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풍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고, 이의 공급책으로 대농장 노예제도가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소지주들은 노예들이 해방될 경우 토지를 놓고 그들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노예제도 폐지에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북부는 ‘자유 토지’와 ‘자유 노동’이라는 신념과 자연법, 이성을 내세우며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한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북부 백인들은 노예제도가 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제도를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남부와 북부는 노예제도와 그를 둘러싼 산업구조에 대해 비판하며 격렬한 대립을 이어나갔다.
노예제도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이는 나아가 정치적 쟁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양측은 자신들의 이익과 정치적 위치를 위해 논쟁하였으며 어느 한쪽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는 것이 정치적 패배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더욱이 북부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국가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 여겼고, 남부는 각 지방이 독자적인 제도를 갖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힘겨루기는 미국의 영토 확장과 결부되면서 더욱 가열화 되었다. 새로운 땅을 차지하고 그곳의 노예제도에 제도 허용여부에 대한 논쟁이 미국이 새로운 영토를 확장시킬 때마다 불거져 나온 것이다.
끊이지 않는 양측의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결국 굉음을 내며 폭발하여 전쟁으로 이어졌다. 링컨은 노예문제로 인해 미국이 둘로 나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또한 미국이 앞으로 공업중심의 산업구조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링컨의 주장에 반발한 남부는 연방을 탈퇴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하는 ‘남부 연합국’을 선포하였다. 링컨은 주들의 탈퇴를 법적으로 무효한 것으로 간주하고 연방의 결속을 회복할 것을 호소했지만 남부 연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남부 연합군 부대가 연방군 요새 셔터를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남북 전쟁은 남군이 북군에 항복하기로 하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격렬한 전쟁이 장기화 되었기 때문에 남과 북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에 패배한 남부 주들의 물리적, 경제적, 정신적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예 해방 선언으로 전통적 경제구조가 무너지고 공업면에서 앞선 북부의 식민지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은 미국의 통합을 위해 탈주한 주들을 조화롭게 연방에 복귀시키려 노력하였으나 1865년 암살을 당한다. 그가 주장하던 남부 재건 안은 묵살되어 남부는 군정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후 여러 가지 재건 정책이 펼쳐졌으나 정치적인 갈등, 그리고 노예의 평등에 대한 확실한 제도의 부재는 20세기에 접어들기까지 큰 문제로 남아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남북전쟁의 원인은 식민지 초기부터의 북부와 남부의 자연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 결합될 수 없는 상이한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남북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의 종합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미국의 연방 형성 후에도 남북이 서로 이질감을 느끼고 전쟁 후 통합계획 속에서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것은 이념적 측면에서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남부와 북부의 정치, 노예문제의 바탕에 있던 감정적인 이데올로기가 마침내 국가를 분열시킨 것을 볼 때 우리는 국가 통합에 있어 국가 구정원의 여론을 수렵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남북전쟁을 통해 알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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